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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5 시사 잡설 - 우리는 여전히 잘 걸어갈 것이다
    삶은다껌 2019. 8. 5. 13:07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걸쳐 '걷기 운동'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초중고생들이 주로 반강제로^^ 참석해야 했고 일정 거리를 걷다 보면 중간에 확인 도장도 손목에 찍어주고, 종착지에 가면 거기서 낙하산 하강이나 모형 비행기 공연 등을 보여주곤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게 좋아서 늘 기다리던 참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미군 기지들이 많았고, 걷기 운동을 하면 미군과 그 가족들이 많이 참여들 했다. 걷는 여정 곳곳에서는 미군에서 지원을 나와 코카콜라 캔을 나눠주곤 했었다. 당시 우리나라 콜라는 뚜껑을 따면 뚜껑 자체가 마치 반지처럼 다 떨어져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미국 콜라는 지금의 우리네 것과 같이 뚜껑이 안으로 쏙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게 정말 부러웠다. 그래서 미군 아저씨들로부터 콜라를 한 캔 얻으면 그걸 먹지 않고 기념으로 집에 가져오곤 했었다.

     

    80년대를 지나면서까지도 맥가이버 전격 Z작전 등 미국산 외화들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었고, 나로서는 그 내용도 재밌었지만 그런 드라마에서 나오는 미국의 일상이 정말 부러웠다. 포크로 국수를 먹는 방식도 정말 고급스럽게 보였고, 내게는 미국에 대한 강한 동경과 선망이 자리 잡았다.

     

    미국에 처음 가본 것은 96년쯤이었다. 대형 쇼핑 센터에 가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온갖 물건들이 즐비했고, 미국 쇼핑 센터를 구경하는 것조차 내게는 엄청난 관광거리였다. 선망하는 나라의 선진 백인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나는 더욱 조심했더랬다.

     

    얼마 가지 않아, 우리나라는 금융위기를 겪었고, 나는 직장생활을 계속 하면서 여러 나라를 출장으로 많이 돌아다녔다. 2005년 무렵, 프랑스의 어느 전자제품 가게에서 문득 깨달았다. 우리나라 가전 제품들이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고급 제품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초중고를 지날 때, 가끔 해외 여행을 다녀온 선생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들로는 미국 시민들은 준법 정신이 투철하다, 싱가포르는 길바닥에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며, 일본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선진국이다 등등이 있다.

     

    2004년에 싱가폴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의아했다. 밤에 선배와 같이 야식을 먹으러 호텔에서 나왔더니 거리에는 쓰레기가 많이 굴러다녔다. (어느 허름한 뒷골목에 묵은 것이 아니라, 나름 괜찮은 호텔이었고 그 근처의 번화가 쇼핑 센터였다!) 확실한 것은, 길거리에 누워 잘 정도는 아니었고, 당시 우리네 도시 밤거리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수준의 쓰레기들이 많았다.

     

    21세기 들어와서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선진국들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확실한 것은 더 이상 그네들 쇼핑 센터가 내게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물건이래야 그 나라 특유의 토속 기념품 정도랄까. 가끔 보면 서울 용산 전자상가의 각종 신기한 전자제품들을 구미 선진국에서는 잘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처음 방문한 것은 올해인 2019년이다. 행선지는 센다이. 3일을 묵었는데, 서울 종로와 별 차이를 못 느꼈다. 말과 글과 차가 움직이는 방향이 다를 뿐. 우리가 범접 못할 수준의 그리 대단한 선진국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본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 일본을 따라 잡은 것이라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 껄끄럽지만, 일본 국민 개개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다만, 그들이 집단이 되어 보여주는 행동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역사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자국의 가해 역사를 전혀 모르며 (또는 모른 척), 여러 보도를 보면 민주주의 성숙도는 확실히 우리가 더 높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나라였을 테지만, 21세기가 와서 20여년이 흐른 지금에 서서 보면 우리와 일본 사이의 거리는 많이 좁혀졌다.

    지금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면 깨끗이 끝날 일이었지만 그들은 전체 차원에서 여전히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여전히 일본이 우리보다 뛰어난 분야는 분명히 여럿 있다. 과학과 공학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와 일본 사이의 간격은 좁혀져 있다. 경제 갈등이 지속되면 우리는 여러 곳에서 힘든 일들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이겨나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독재를 몰아냈고,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키워 왔고, 우리가 아차 해서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버젓이 이를 극복해냈다.

     

    장기적으로는 누가 더 손해일까? 나는 일본의 패배 쪽에 건다. 왜냐, 그들은 명분 없는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만큼 먼 길을 걸어왔고, 그것도 훌륭히 잘 걸어 왔으며 그들과의 간격이 매우 좁아져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총성 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 쪽으로 투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개인 의사를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경계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비록 겉으로라도 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약한 소리 할 거면 그냥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환영받고 살면 된다. 왜 전쟁의 한가운데서 적에게 이로운 소리를 지껄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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