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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에 관한 단상
    삶은다껌 2019. 8. 16. 16:34

    어릴 때 가위 눌리듯이 반복적으로 꾸던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귀신이 아님에도 어린 내게는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형체를 설명할 수가 없다. 뭔가 검은 구름 같은 기운이 엄청난 크기로 커지면서 하늘로부터 나를 덮쳐 오고, 나는 상대적으로 한없이 작아지는 그런 꿈이었다. 그 꿈을 꿀 때면 예외없이 느껴지던 목넘김의 맛도 있었다. 마치 내 혀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듯한 식감. 공포를 맛으로 표현한다면 그런 것일까?

    거대한 존재에 대한 공포? 아니면 어린 아이로서는 공포의 형태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외경심?

    청년이 되고 아저씨가 되면서 그 꿈의 공포는 어느새 그냥 추억이 되어 버렸다. 또한 어릴 때 막연히 가지고 있던 사후 세계에서의 심판에 대한 공포도 머리 속에서 지워졌다.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신에 대한 존재는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면 피조물을 심판할까, 아니면 따뜻이 감싸줄까? 정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신이라면 답은 한 가지다. (그러니까, 세상 막 살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럽 어느 국가로 출장을 갔던 몇 년 전의 어느날 밤. 시차에 시달리며 자는 둥 마는 둥, 억지로라도 자야 한다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중이었다. 잠이 스르륵 들려는 찰라. 호텔방 문 쪽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러나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발걸음으로 내 침대 쪽으로 다가 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남성적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고 급기야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내 옆으로 슬쩍 눕는 무게감까지 느껴졌다. 분명, 여행 피로에 따른 개꿈이었겠지만 그것을 느끼던 순간의 내게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공포감이 솟아 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가위눌림 공포였다. 하지만 불과 몇 초 뒤. 아저씨인 나는 화난 듯이 그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내서 말했다.

    "피곤하다. 그냥 꺼져라."

    마치 전구가 꺼지듯이 그 미지의 존재는 한순간에 내 옆에서 사라졌다.

    서양 귀신을 느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며 이러 저러 여러 지식을 쌓으면서 귀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마저 내게서는 사라졌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가위눌림 꿈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랑의 신은 그립지만, 공포를 주는 귀신같은 존재는 믿지도 않을 뿐더러 정말 있다 해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로 반문할 정도의 뻔뻔스러움 내지 용기(?)를 갖춰버린 나이가 되었다.

    요즘은 차라리 길가다 마주칠지 모를 건장하면서 험상궂은 사람이 더 무섭다. 귀신이야 비록 있다 한들 그것을 믿지 않아 버리면 내게는 아무 영향을 못 준다는 확신을 하지만 사람은 내게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있으니.

    유신론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이 우주를 만들었되 창조 후에는 손을 완전 놓고 있다'는 설이다. 언뜻 들으면 웃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나름 의미가 있는 설이기도 하다.

    창조를 일단 한 후,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살아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는 신. 인간 개개인 삶의 희로애락이 관찰 대상으로서의 가치는 있으되, 신이 개입하면 자유의지의 가치가 훼손된다는 논리. 왕후장상의 삶도 결국은 영원할 수 없고, 비참한 노예의 삶이나 비극적 죽음도 더 큰 존재의 관점에서는 다만 흘러가는 한 순간의 경험적 정보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조.

    어찌 보면 뭔가 허무한 것이지만, 달리 보면 뭔가 더 큰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존재론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사 모든 과정에 개입하고, 자신을 따른다 해서 큰 복을 주고, 자신을 믿지 않는다 해서 엄청난 징벌과 그것도 모자라 사후 세계의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는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인간미와 사랑이 넘친다.

    물리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경과가 사후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영원한 천국의 그 지겨움은 영원한 지옥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물리 세계에서의 시간에 따른 영원성은 그 자체가 형벌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점 더 행복한 순간들을 맞이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점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 가해지는 그런 천국과 지옥도 상상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신이라 한들 그 정도 강력한 무한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경우는 신 스스로가 지쳐 쓰러질 것이다. 신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신이 되어 버리니까.

     

    나도 언젠가는 지금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가겠지. 망각 속으로든, 아니면 더 큰 존재에게 내가 살아온 날들을 얘기해주든.

    만일, 거기에 갔더니 내가 싫어하는 모습의 신이 있어, 너에게 벌을 내리겠노라 한다면 나는 그냥 꿈 깨쇼라고 말하고 내 스스로 그냥 눈을 떠버리고 싶다. 그것이 내게는 이 지겨운 삶을 또 살아야 하는 형벌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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