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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파릇하다는 신입생 소리를 듣던 때가 말그대로 어제 같은데, 어느새 나는 늙은 예비역 복학생이 되었고, 이제는 다시 새출발을 하는 길에 섰다. 남들이 다 선망하는 대기업. 배치받은 부서에 신입 인사를 하는데 파릇파릇하다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보다 더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들도 있지만, 나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 들어온 동기들도 있지만 부장님 말씀처럼 이제는 다시 출발선에 선 거지.
나이 오십을 몇년 안 남기고서 새롭게 배우는 일. 딱히 할 생각도 없었고, 나의 원래 소망 목록에도 없었지만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 보물섬 이야기에 나오는 외팔이 의수처럼 생긴 기계팔을 들고 밀가루와 물을 붓는다. 윤호 형에게 배운 그대로가 맞는지 노트를 다시 본다. 이제 다시 출발이야.
지형이 자꾸 묻는다. 오빠 요즘 뭐하냐고. 늘 똑같은 일이다. 복사, 인쇄, 복사, 인쇄. 지형이 웃으며 놀린다. 오빠는 대기업 들어간 것이 아니라 복사 가게 취업한 거 아니냐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일을 배울 때니까.
자신감이 자꾸 사라진다. 반죽은 내가 봐도 매일 매일이 다르다. 윤호 형은 언제나 똑같은 감촉으로 만드는데. 차이가 뭘까? 배합 비율도 같고, 기계도 같고, 시간도 같다. 도대체 그 차이가 뭘까?
내가 꿈꾸던 회사 생활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회사에는 능력 보다는 정치를 앞세우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누구 라인인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업무의 효과보다는 똑같은 일을 누가 누가 더 오래했나를 가지고 평가를 한다. 일찌감치 외국으로 취업을 한 친구들은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다.
한국이 그립다. 적당히 비비고 살면 되는데 내 성질을 못이긴 내 탓이다. 빠르게 승진한 친구 몇몇으로부터는 벌써 임원 승진 소식도 들린다. 나보다 뒤에 서있다고 생각한 친구들도 있다. 부럽다. 이건 질투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온 친구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스스로의 성질을 못이기고, 꾸준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질책에서 나오는 부러움이다. 승진 축하 메시지를 보내줘야지.
최선두 그룹 승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장 승진을 하고 나니 기분은 좋다. 이런 맛에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일까? 그래도 아쉽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부장 승진 과정을 위한 점수를 착착 쌓고 있는데.
여지껏 남은 미련과, 가끔 보이는 진상 손님들 때문에 아직 담배는 끊지 못했지만, 오늘은 그래도 내 제품이 맛있다고 말하는 손님들이 많이 보여서 기분은 좋다. 이제 조금씩 매상도 오르는 경향이 보인다.
차장 승진 때도 한번 물 먹이더니, 부장 때는 두번이나 물을 먹이네. 그래, 니들끼리 다 해먹어라. 나는 그냥 내 길 가련다 마음 먹고 나온지 벌써 2년.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통장 잔고는 반환점을 돌아선지 오래고, 앞으로의 길이 막막하다. 미국에 간 선배 형에게 전화를 건다.
윤호 형과 통화를 하고, 남은 재산 싹 들고 온 지 어언 2년. 형으로부터 1년간 착실히 제빵 일을 배웠고, 내 사업을 시작한지 1년. 밤과 낮을 뒤집어 사는 리듬이 결코 쉽지 않다. 가끔은 깊은 후회에 빠져 의욕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다. 아내 지형은 늘 내 선택을 존중해왔다. 지금까지 내 삶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아내를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여기서 주저 앉을 순 없지. 내일부터 담배를 끊어볼까?
윤호 형은 내 선택을 존중해줬다.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한 대 피워본다. 앞으로의 내 삶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