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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모론이 황당한 길로 잘 빠지는 이유
    과학철학 2019. 8. 7. 17:19

    어느 사이트에서 태양열의 진위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애초 쳐다보지를 말았어야 하는 주제였다. -_-;) 질문자는 처음에 단순히 물었다.

    "아담스키라는 사람이 그랬다던데 태양은 별로 안 뜨겁다고요, 여러분 생각은요?"

    어찌 보면 황당하지만, 질문의 말투는 정중하고 진지했다. 그래서 몇 개의 댓글이 달리고, 나 역시 태양이 뜨거운 것은 과학적 관측의 사실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바로 이어진 질문자의 댓글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래, 서양의 과학을 믿는 당신들은 수구세력이다"

    나는 언뜻 정신적으로 매치가 되지 않았다. 태양 뜨겁다는 사실 설명한 것이 왜 갑자기 수구세력의 편으로 규정되는지?

    몇 개의 댓글이 더 이어지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음모론에 한참 빠진 초등학생을 상대하는 것은 아닌지. -_-;

    논점이 한번 흐트러지면 도저히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이 잘못된 토론 문화의 한 단면이다. 이것은 또한 인터넷 익명 댓글의 단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다 감정싸움으로 흐르기도 쉬울 것 같고, 태양의 뜨거움조차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과 논쟁한다는 것도 더 이상 의미도 없어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과학적 접근법을 선호한 죄(?)밖에 없는 내가 갑자기 전혀 뜬금없는 수구세력으로 불리고 나니 갑자기 뜬금없는 의문이 들었다.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가 과연 있을까?'

    나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서로가 상대적 장단점은 있을지라도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고 본다. 서양사상체계는 현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데는 뛰어나지만, 그 내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의외로 적다.
    반면, 동양사상체계는 존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뛰어나나 현상에 대한 논리정연한 객관적 설명체계는 많이 아쉽다.

    인류는 결국 하나의 지구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만 명심하면 동양이니 서양이니, 나아가 한국이니 러시아니 이런 식의 국가적 구분도 무의미하다.

    현대 과학의 뿌리는 그리스에 있다. 물론, 그리스 이전에는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영향이 있겠지만, 경험적 산수가 아닌 현대의 엄밀한 수학적 기반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그리스 사람들이 최고로 뛰어난 인종이라는 둥,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둥, 이런 쓰잘데기 없는 논쟁으로 치닫는 것은 정말이지 지겹고 황당하고 혐오스럽다.
    한국인 격투기 선수 누군가가 외국의 어느 강자를 이겼다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나는 제일 우습게 여겨진다. 나는 그 선수와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그 개인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지성도, 김연아도, 타이거 우즈나 호나우두도 같은 지구인일 뿐이다. 물론 방금 내가 거론한 사람들 개인의 특정 역량은 보통의 우리들과는 엄청나게 다르지만.

    불교나 도교적 고찰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내가 불교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식견이 짧아 깊은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상일 수도 있다.' 이런 류의 고찰들을 나는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호에는 분명히 어느 한계를 그어야 한다. 이해를 향한 노력과 무작정 선호라는 끌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서양과학을 잘못 배운 사람들은 그것이 오로지 길이요 진리인 줄만 안다. 비압축성 베르누이 식을 겨우 어설프게 이해한 사람이 그거 하나 가지고 온갖 세상만물을 해석하고 심지어 예측하려 드는 경우도 봤다. 그냥 유체역학 관련 식일 뿐인데. 그러다 자기의 예측이 틀린 것으로 관측되면 이번에는 관측을 의심한다.

    이와 똑같이 동양철학에 빠진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한다. 어찌 보면 수학을 못하니까 그렇게 빠졌다고 놀릴 수도 있겠다. 산수와 수학은 엄연히 다름에도 그들은 정수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얄팍한 산수적 지식으로 온갖 일들을 다루고 아는체 한다.

    내게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다. 그 중에 한 녀석. 도교의 탈을 쓴 어떤 사이비 파에 빠졌었더랬다. 약 6개월 간의 치열한 공부(?)를 마치고 내게 한 말. 88 올림픽은 이미 우리 민족 언어에 예언되어 있었단다. 용용 죽겠지? 용은 숫자 8에 해당하고 용용이면 88이다. 그리고 88년에 한민족은 세계를 놀라 자빠지게 한다. 그래서 용용 죽겠지 = 88년에 놀라 자빠진다를 예언한 것이란다. -_-;

    지금쯤 피식 피식 웃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친한 친구의 워낙 진지한 해석이라 그 녀석 앞에서 감히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방금 소개한 내 친구같은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음모론 신봉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음모론도 따지고 보면 아주 다양한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정말 진지한 고찰을 통해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권력을 파헤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를 안 믿었었는데, 최근 '화폐전쟁'이라는 책을 보고 난 후 자본적 음모론에는 점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게는 참 어려운 분야라서 깊게 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진지한 고찰을 통해 나오는 음모론은 나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천 년이 넘는 역사에 걸쳐 벌어지는 아주 복잡한 경제 이론이 여기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필이면 역사에 어둡고 경제에 둔해서 아직도 전체 내용을 잘 이해 못한다. 그러므로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지, 결코 그 연구자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그들의 의심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틀렸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 제대로 되었나가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진지한 음모론자들의 방법론은 역사와 경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걸 이해해보려 (조금씩이나마) 공부하는 중이다.

    그런데 진지한 음모론의 두 바탕인 역사와 경제를 조금도 이해 못한 사람들은 서서히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종착점에 이르는 것이 결국은 미국 국방성 지하에 외계인이 있고, 미국은 이미 외계의 반중력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할 음모를 꾸미고, 화성에는 거대유적이 있으며, 달은 외계인 기지다.. 이렇게 황당한 지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외계인을 숨기고 있을 수 있고, 달은 외계인의 우주선일 수도 있다. 그런 전제나 가정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 다중 우주론이나 초끈이론 등 오히려 더 황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현대물리적 가설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문제는, 단순 음모론자들은 의심만 할 줄 알고 진지한 접근을 위한 방법론은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맨날 말만 많다. 누가 카더라 말고는 더 이상 없다. 마치 카드 돌려막기 행위와 똑같다고나 할까.

    과학적 사실들을 무조건 부정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음모론을 이해하자면 역사와 경제에 대한 이해가 필수도구이듯이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음모론 추종자들은 수학이나 물리에 대한 이해를 저 아래 수준에서 포기하고 자기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서는 거기서 물리의 허점을 발견했다고 좋아라 한다. 아주 전형적인 예가 하나 있다.

    기압이 낮아지면 온도가 낮아진다. (일단 맞는 말이라 봐줄 수 있다.)
    따라서 진공은 정말 차갑다. (진공만 놓고 보면 얼추 맞는 말)
    태양 가까이는 진공이다. (맞다고 봐줄 수 있는 말)
    그러므로 태양은 별로 뜨겁지 않다. (여기서 황당한 쪽으로 무너진다.)
    .. 이런 식의 정말 대단한 상상의 점프를 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너무 진지하다. 열 현상 중, 대류만 생각하고 복사는 전혀 모르는 무식함을 드러내면서도 말이다.

    화성에 인공유물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나는 없다고 믿는 편이다. 화성 가지고 놀기에는 우리 우주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화성에 설사 인공유물이 있고, 고대 유적이 있었고, 지구인의 고향이 화성이라 한들 내게 있어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면 결국 화성인 너희는 기원이 어디냐는 질문이 이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내가 물리나 수학을 아주 조금 안다고 해서, 나보다 조금만 더 모르는 다른 계통의 사람을 비웃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배울 자세가 되어 있으며, 나와 다른 믿음체계의 사람과 진지하게 토론하고 싶다. 백두산 정상은 하나지만 오르는 길은 여럿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괜찮은 사이트인듯 해서 들어가 얘기 좀 해볼라치면 언제나 이상한 친구들이 분위기 확 흐려버린다. 얼치기 음모론 신봉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진지한 토론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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