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다껌

2019.07.17 시사 잡설 - 가짜뉴스를 막으려면

초끄네끼 2019. 7. 18. 08:34

언제부터인가,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시사 뉴스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몇가지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모아서는 이를 적당히 짜집고 왜곡해서,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진짜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가짜뉴스다.

길게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유언비어와 완전히 똑같은 말이다. 유언비어라는 오래된 단어가 있음에도 가짜뉴스라고 부르는 것은 왜 그럴까? 아마, 골동품 보다는 앤티크라는 말이 더 있어 보이는 약간의 허세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싶다.

가짜뉴스든, 유언비어든 사실 그 역사는 오래 되었다. 역사책이나 역사 소설에도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유언비어는 상대를 꺾기 위해서 쓰인 전략 중 하나인 것이다. 아, 물론 옛날에도 잘 써먹었으니 현대 사회에서도 잘 써먹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유언비어나 가짜뉴스는 상당히 처벌 강도가 높은 범죄로 다루어야 한다.

인터넷 세상이 된 이후, 더구나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가 된 이후 사람들은 점점 더 손쉬운 검색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손쉬운 검색 결과가 진실에 기반하고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 참 문제다.
손쉬운 검색을 하다 보면 그 정보의 진위 근거를 검색 순위나 방문 횟수 등에 의존해버리기 쉽다. 인터넷 세상의 단점이랄까. 검색 순위의 높은 자리에 한번 올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손쉽게 정보 검색 상위 순위 자리를 굳건히 하게 된다.

이는 어느 연구 결과에도 있다. 인기 곡이나 영화 등도 사실은 광고나 여러 기획 덕분에 일단 상위를 차지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식은 죽 먹기로 상위 자리를 공고히 한다. 광고의 힘이나 그 부작용에 대한 비평은 다음 기회로 하자.

가짜뉴스나 유언비어의 처벌에 관한 법은 아직 좀 불분명한듯하다. 기술의 발전을 법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 필요하다. 검색순위 조작 등등. 그런데 이런 사회적 문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진국들이 같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짜뉴스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시민 개개인이 깨어있는 것이다. 쓰인 단어들이 '가짜뉴스'나 '시민'이라서 정치에 가까운 얘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지금 사회 전반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책을 잘 읽지 않는 사회나 문화에 대해 전해주고픈 말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주장을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이 점점 인기 순위 상위에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의심을 해야 한다. 반드시 잘못된 주장일 것이라는 그런 삐딱한 의심 말고, 저 주장을 하는 이는 저 주장을 통해 어떤 이득을 노릴까. 저 주장의 반대측에서 본다면 저 주장의 허점은 무엇일까. 이런 방향으로 의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화성에 고대 문명이 있었다, 달 착륙은 거짓이다,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 등의 얘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게 중에는 정말 자기 주장을 확신하고 깊은 (하지만 참 쓸모없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상당수는 그냥 돈벌이나 관심 끌고 보자는 목적으로 근거 없는 소리를 막 지어내고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상대의 반박에 이성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저 감정적으로 대응할 뿐이다. 나 역시 인터넷 상에서 이런 음모론의 주장 근거 몇 개를 과학적으로 반박 내지 의문을 표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음모론자들은 하나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완전 무시 이 두 가지 방식으로만 일관했다.

감정적 대응이라 함은, 나는 그냥 과학적 의심을 제기했는데 느닷없이 내 직업은 내 질문과 무관하니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나오거나, 반대로 내 직업 경력 자체를 아예 거짓이라고 우기는 식이다.

정치적 가짜뉴스를 주장하는 사람도 똑같다. 정치적 가짜뉴스는 확실하게 음험한 의도가 있다. 요즘 보면 가짜뉴스는 주로 어느 한 정치 진영에서 전문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고 가던데, 내 보기에는 두 대치 진영이 똑같이 가짜뉴스 전략을 쓴다. 아님 말고 식의 가짜뉴스 전략은 양 쪽에 똑같이 다 있다. 그 둘은 하나같이 나는 결코 가짜뉴스가 아니라고 뻗대는 모습조차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한 쪽은 주류파가 가짜 뉴스를 주도적으로 즐긴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극렬 지지층이 스스로를 속이는 경지로 그런다는 정도.

합리적 의심을 해보면 가짜뉴스의 허위가 점점 더 보이게 된다. 그런데 합리적 의심의 학습법은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 두 개밖에는 없는 듯하다. 독서와 토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 능력이 정말 부족하다. 독서하기 보다는 스마트폰의 게임과 단편적 정보 검색에 더 많이 의존하고, 토론하기 보다는 그냥 무관심 내지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에 현혹되면 누가 제일 손해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로 나 자신이다. 허상을 믿고 살다가 어느날 문득 내가 믿고 살던 실상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감은 그 누구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독서와 토론. 정말 강조하고 싶다. 토론이 고리타분하게 들린다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불러도 상관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