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원리
인간원리(anthropic principle)는 물리학자들이 만든 개념입니다만, 과학의 범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에 더 가깝습니다.
(물리학자라 할 때, 보통 말하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화학, 수학 등을 통틀어 말하겠습니다. 과학자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서는 왠지 많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원리도 여러 종류와 단계가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표현하면, “바라볼 지성이 없는 우주는 존재 의미가 없다.”입니다.
우주는 137억년 전에 탄생되었지만 지금 여기서 우주를 바라볼 인간이 없었다면 애초에 탄생이나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언뜻 인과관계가 뒤바뀐 듯한 인상도 줍니다.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인간원리를 얘기합니다만 정작 정식 과학에는 선뜻 집어넣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원리를 강하게 부정하는 물리학자들도 있습니다만,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는 인간원리가 주는 신비스러움이랄까 호기심 자극제랄까 그런 면이 분명 있습니다. 인간원리는, 지구라는 행성 위에 지성을 가진 인간이 출현하기 위해 얼마나 정밀하게, 또는 얼마나 어렵게 이 우주가 진화의 길을 걸어왔는가 하는 여러 관측 결과들 때문에 고안된 개념입니다.
자연(우주)에는 네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원자핵 수준에서 작용하는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이 있고 전자기력과 중력이 있습니다. 강한 핵력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붙들어 주는 힘이고, 약한 핵력은 중성자 붕괴와 관련이 있는 힘입니다. 전자기력과 중력은 일상 생활에서 항상 보고 느끼는 힘들입니다.
이들 네 가지 힘은 크기가 서로 다릅니다. 한편, 중력은 네 가지 힘 중에서도 특이하게 작습니다. 전자기력은 중력에 비해 10^38배나 큽니다.
(10^36배이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 뭐 이거나 저거나 0에 가까운 것은 변함없지만^^)
동그라미가 38개가 붙어야 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쉽게 감이 오지 않죠. 자석을 예로 들겠습니다. 땅바닥에 자석 하나를 둡니다. 중력 때문에 자석은 당연히 땅에 떨어져 있지, 저절로 뜨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자석 하나를 그 근처에 가져다 대면 자석은 펄쩍 뛰어올라 위의 자석에 달라붙죠. 그렇습니다. 엄청나게 큰 지구가 중력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새끼손톱만한 자석 하나가 자력으로 이겼습니다. 중력은 전자기력에 비하면 그만큼 미미한 힘이죠.
강한 핵력, 약한 핵력, 그리고 전자기력은 서로가 몇 백 내지 몇 천 배 차원에서 크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우주 탄생의 순간에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면서 이들 세 힘을 통합 즉, 하나의 단일한 힘으로 표현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게 도대체 뭔지 저는 잘 모릅니다만.. ^^)
하지만 중력은 다른 세 힘에 비해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아직도 통합이 요원하다고 합니다. 초끈이론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중력을 다른 세 힘과 통합하려는 노력들 때문입니다.
이들 네 가지 힘이 가지는 그 미묘한 또는 0에 차라리 더 가깝다고 할 비율. 그것이 우주 탄생 시점부터 정밀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별들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빨리 핵융합을 해버림으로써 인간은커녕 지구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 지구가 필요하고, 지구가 태어나기 위해 별들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한 무거운 원자 생성이 필요하고, 별들이 제대로 태어나서 핵융합을 하여 적절한 양의 무거운 원자를 만들려면 네 가지 힘의 미묘한 비율이 필요합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핵력은 제쳐두고 일단 전자기력과 중력의 관계만 보겠습니다. 핵융합은 별이 중력으로 밀어붙이는 강한 압력이나 힘에 의해 원자의 껍데기에 해당하는 전자들의 전자기적 반발력을 이기고 원자핵이 서로 뭉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중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강했다면 핵융합은 너무 빨리 일어납니다. 핵융합까지야 어찌 되고, 별이 다 타고 나서 터짐으로써 무거운 원자들을 우주에 뿜어내고, 이 우주 먼지들로부터 또다른 별과 행성이 생기는 것 까지야 가능하다손 쳐도 별들 자체가 너무 빨리 타기 때문에 행성 위에서 수 억년에 걸친 안정적인 생명 진화를 할 수 있는 에너지 제공이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중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약했다면 전자기적 반발력 때문에 핵융합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더 큰 별이 되어 핵융합을 한다 쳐도 이번에는 이 별이 죽은 이후 잔해들이 다시 뭉치는데 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됩니다. 생명이 출현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려버리는 사태가 초래되는 거지요.
네 가지 힘의 적절한 크기 균형에 따라 별들은 태어났고, 별들이 폭발하여 죽으면서 새롭게 융합된 무거운 원자들이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가고, 그것들이 뭉쳐 새로운 별과 행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태양과 지구가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아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한편 태양은 너무 커서 아주 강렬하고 빠르게 불타지도 않고, 반면 너무 작아서 담뱃불처럼 가녀리게 타지도 않습니다. 아주 적당한 온도로 장구한 시간에 걸쳐 탑니다.
지구는 원래 생성 때부터 가진 물, 그리고 이후 혜성들이 실어 나른 물(얼음)을 받아 물이 아주 풍부한 행성이 되었으며, 태양과 적당한 거리에 있음으로 해서 액체 상태의 물을 오랜 시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태양에 너무 가까웠다면 물이 왕창 증발했을 것이고, 너무 멀었다면 물이 꽁꽁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메마른 수성, 화끈한 금성, 차갑게 식은 화성. 그 사이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있습니다.
한편 생명 진화에는 달이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달은 비록 위성이지만 지구에 비해 그리 많이 작지 않습니다. 이런 커다란 달이 지구의 안정된 자전 속도뿐만 아니라 자전축의 안정된 기울기 유지에 큰 힘을 발휘해 줍니다.
자전 속도가 안정되지 않고, 자전축이 안정되지 않았다면 (자전축은 그래도 세차운동으로 조금 떨긴 합니다만), 안정된 기후 조건이 불가능하고 생명 진화도 어렵습니다. 한편 달은 지구를 보는 쪽 보다는 지구를 등진 쪽에 훨씬 더 많은 곰보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이 없었다면 죄다 지구로 쏟아졌을 그 엄청난 운석이나 소행성 충돌을 달이 대신 맞아준 겁니다.
소행성 충돌 한번 제대로 맞으면 지구의 생태계가 전멸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영화를 통해 익히 아실 겁니다.
지구에 거대 운석이나 소행성이 그리 자주 충돌하지 않게 하는 데는 저 멀리 떨어진 목성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탄소라는 원소는 생명 진화에 큰 역할을 하는데, 탄소는 그 화합물의 유연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딱딱한 덩어리가 아니라 유연한 몸을 가지는 다세포 생물 출현이 가능했습니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 만들어진 물 역시, 우리는 그냥 평소 보는 거라 당연시하지만 고체가 되면서 오히려 액체보다 가벼워지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음이 만약 물보다 무거웠다면 어는 족족 아래로 쌓이고 이러면 호수나 바다는 기온이 약간만 내려가도 순식간에 몽땅 꽁꽁 얼어 버릴 테니 생명 진화가 역시나 어렵습니다.
얼음은 물에 뜨기 때문에 기온이 아주 떨어져도 얼음 자체가 물 위에 떠서 일종의 보온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고 물은 섭씨 4도일 때 밀도가 가장 크기 때문에 바다나 호수의 아래쪽에 서식하는 생물들이 물 표면의 기후 변화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진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되면서 오히려 물보다 가벼워지는 이유는 물 분자의 구조에 기인하며 물 분자는 부분적으로는 약간의 전기적 편향을 가집니다. 그래서 물은 분자 결합력이 강한 편이라 액체 치고는 비열이 매우 크고, 한편 다른 많은 양분이 될 만한 물질을 잘 녹입니다. 이 역시 생명 진화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아미노산의 구조라던가 DNA 구조를 볼 때 이것은 지구 위에서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개별 원자의 특성이 그렇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런 구조가 나온다고 하는데 저는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래서 외계 생명체도 만약 있다면 우리네 DNA와 매우 유사한 구조의 DNA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과감히 추측하기도 합니다. 단, 이것이 바로 잡종이 가능하다.. 이런 류의 상상 점프는 결코 아닙니다.)
이렇듯 인간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에 가까운, 요소들이 밑바탕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이 우주는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탄생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이고 이 시각을 인간원리라 부릅니다.
이런 반문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다른 별 또는 다른 은하계에 외계 지성이 존재할 경우 이 우주는 그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한 것인가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런 반문은 이 세상을 너무 인간 위주로만 보는 편협성이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원리라는 말에 들어 있는 인간은 사실 지구 위 특정 생명체라기 보다는 지성 자체를 말하는 것에 더 가까우니까요.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이 우주는 원래 은하 저 너머 다른 지적 존재를 위해 설계되었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산물로 나온 것일 수도 있죠 뭐.. ^^)
저는 이런 소설적 상상을 해봅니다. 언젠가 소설로 쓰고 싶어서요. 어떤 초월적 지성이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 내지 존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 우주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런 상상은 종교에 가깝죠.
보수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을 부정하는데, 사실 인간원리를 잘 들여다보면 기독교 논리에 맞출 수 있는 내용들도 많습니다. 신의 뜻으로 만들어지고 진화해 온 우주라는 관점으로 맞춘다면 말이죠.
교회를 몇 번 들락거릴 때, 진화론 입장에서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게 말씀하시길,
“신은 찬양 받기 위해 인간을 만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가만 생각해보면 역시나 인간원리와 비슷합니다. 바라보고 음미할 존재가 없는 우주는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